언더독(under dog)의 반란
태안장로교회 원로목사
태안신문사 칼럼니스트
사회복지사
글:-남제현목사
대중에겐 약자가 강자를 이겨주길 바라는 심리가 있다. 매번 우승하는 팀보다는 만년 꼴찌팀이 승리의 역전 드라마를 만들어냈을 때 더 짜릿한 기쁨을 느낀다. 특히 패자 부활로 올라와 우승한 사람을 더 응원하게 된다. 스포츠에선 이길 가능성이 없는 팀이 반전을 일으켜 승리했을 때 ‘언더독(under dog)의 반란’이라고 한다. 투견장에서 유래된 말로 밑에 깔린 개가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월등한 상대와의 경기에, 달걀로 바위 치기와 같은 상황에서 언더독의 승리를 응원한다는 것이다. 언더독의 승리에 열광하는 심리적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짧은 삶에 성공보다는 실패에 더 익숙하다. 치열한 삶은 승자의 짧은 미소가 아니라 패자의 눈물이 더 많다. 어쩐지 약한 팀에 자신을 투영하기가 더 쉽다. 처음부터 완벽한 게 아니라 역경을 하나씩 극복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응원하면서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란 긍정의 감정을 느낀다.
사람들 대다수는 하루를 반복해서 살아간다. 어제와 똑같이 오늘을, 오늘과 똑같은 내일을, 내일과 똑같은 모레를…. 그 안에는 크고 작은 일이 다채롭게 벌어지지만 큰 차이는 없다. 일어나서 출근해 일터에서 고단한 하루를 보낸 후 퇴근해 잠드는 삶을 매일 되풀이한다. 때때로 여행을 가거나 뜻밖의 사건이 일어나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제자리로 돌아와 일하고 먹고 잠드는 삶을 죽는 날까지 반복하며 이어간다. 누구나 자기 삶에 파격적 로맨스가 있기를 기대하고 눈부신 격변이 도래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고 망설이는 사이 기회는 되 돌림하고 만다. 그러나 아무 일 없이 살아도 꽤 행복하다는 일 때문에 진정한 행복에 이르지 못하게 만드는 함정이다. 일상의 삶에 만족은 극히 드물다.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자기 삶이 의미로 충만하기 때문에 만족으로 착긱한다. 살아갈 이유가 있는 사람은 지옥 같은 삶이라도 견딜 수 있으나,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하는 의문이 들면서 또 하루를 살아간다.
긍정적인 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 호주 퀸즐랜드대 교수는 “의미를 추구하도록 회로화돼 있기” 때문에 삶의 목적과 방향을 상실한 사람은 더 불행하고 더 실패한 인생을 살다가 더 자주 병들고 더 빨리 죽는다. 반면에 의미는 우리 삶을 즐겁고 건강하고 행복한 방향으로 이끌어 갈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 일 없이 일상을 안온한 평화를 주지만 우리를 결국 권태와 우울에 빠뜨린다.
원로가수 명국환씨는 국민이 좋아하는 가수이다. 지난달 19일 인천 남동구에 있는 요양병원에서 향년 9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백마야 울지마라’, ‘방랑시인 김삿갓’, ‘아리조나 카우보이’ 등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문제는 사망 2주 만에 함께 장례 해줄 가족을 찾았으나 없었다. 그래서 "무연고 처리까지 갔다. 그는 그동안 가족 없이 홀로 지내며 생활고를 겪어것이 알려졌다. 1927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고 명국환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가족과 함께 월남해 정착해온 실향민이다.
화목한 가정생활, 좋은 건강과 함께 안정된 경제 상황은 주관적 행복도, 삶에 대한 만족을 준다. 그러나 2022년 유엔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미국은 가장 행복한 국가가 아니다. 핀란드 덴마크 아이슬란드 등에 못 미치는 16위 수준이다. 경제 규모 12위인 한국은 초라하게도 행복 순위 59위에 불과하다. 이유는 무었일까 ? 일정 수준을 넘으면 돈이나 지위는 행복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게다가 행복한 북유럽 국가는 수상하게도 유난히 자살률이 높은 나라들이기도 하다. 미래의 희망이 보이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예가 세계 1위인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이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지만, 진짜 행복을 누리는지는 불확실하다. 일상의 평화를 넘어서는 의미로 충만한 삶만이 궁극의 행복을 결정하는 까닭이다. 알베르 카뮈의 인간의 최후를 고백하고 있다. “하루하루 이어지는 광채 없는 삶에서는 시간이 우리를 떠메고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이 시간을 떠메고 가야 할 때가 오게 마련이다.”
이를 카뮈의 반항이라고 부른다. 일상에 대한 반항은 삶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 삶의 위대함을 회복시킨다. 삶의 무의미를 이기려는 노력은 우리 가슴에 정열을 일으키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북돋우며, 순간순간에 주의를 기울이면 인생을 더 많이 느끼면서 살게 만든다. 광채 있는 삶을 갈망하는 순간이 오면, 사람들은 살아도 죽은 것 같은 삶을 거부하고 삶의 의미를 돌려받기 위해 몸부림 치게 된다.
어느 부잣집에 주인은 그 종을 항상 어리석긴 해도 심성이 착해서 그 종을 계속 데리고 살았다. 하루는 주인이 그 종에게 지팡이 하나를 주면서 "너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을 보면 이 지팡이를 주라"고 했다. 종은 수년이 지나도록 기다렸으나 자신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을 찾지 못하였다. 세월이 흘렀다. 평소 명랑하던 주인이 슬픈 얼굴로 하루는 종을 불렀다. 중병에 걸린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그 종도 주인을 따라 우울한 얼굴로 주인의 말을 들었다.
종은 주인의 떠난다는 말을 듣고 "무슨 준비를 할까요"라고 물었다. 주인은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면서 자기 방에 둔 지팡이를 가져와서 이 지팡이라도 가져가라고 하면서 건네주었다. 그러나 종은 하는 말이 "오리를 가도 나한테 이것저것 준비시키더니 영영 못 오는 길을 떠나면서 준비 못 한 당신이 나보다 더 바보요 어리석다"라고 하더란 것이다.
의미 있는 삶의 말이다. 삶의 의미이란 덧없이 하루를 흘려보내지 않고 덧없는 세상의 삶에서 불후의 삶을 길을 알면 인생은 무의미하지 않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은 래일을 알고 아름다운 순간을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을 기억하고 믿는 영원한 삶이요. 불행에 지지 않는 내일을 영원히 간직한 믿음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