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어려운 결심..(4월21일 칼럼)
태안장로교회 원로목사
사회복지사
글:-남제현목사
태안신문사 칼럼니스트
“용기를 내줘 고맙다” “얼마나 두렵고 힘들었냐” 근래 우리 사회에서 가장 귀한 만들이다. 빌고 용서를 받아들이는 장면이다. 31일 오전 광주를 찾은 5·18 기념문화센터에서 어머니들에게 전 전두환 대통령 손자 전우원씨가 “제 할아버지 전두환 씨는 너무나 큰 죄를 지은 죄인이자 학살의 주범”이라 고백하자 어머니들은 눈물을 흘리며“용기를 내줘서 고맙다”라며 전 씨를 안아주고 손을 붙잡아줬다.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은 없다. 광주의 오월 어머니들이 자녀들을 학살자의 손자를 오히려 위로하여 주는 장면이다. “그동안 얼마나 두렵고 힘든 고통의 시간을 보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라면서 이제부터는 “광주를 제2의 고향처럼 생각해달라”는 말을 건네며 가슴에 품어 주었다. 진정한 어머니의 말이다.
그는 학살자 할아버지가 못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자기 외투를 벗어 희생자 묘비를 닦아가 가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 세상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과 말들이 어디에서 왔을까 어머니들이다. 여자는 연약하나 어머니는 위대하다.'라는 말이 실감 나게 하는 말씀이다. 동물도 마찬가지인 간밤에 헛간에 불이 나 나가보니 수탉들은 다들 밖으로 뛰쳐나왔는데 병아리를 품은 어미 닭은 까맣게 타죽었다.
여자가 아니라 어머니의 위대한 모정이 넘쳐나온 말이다. 모든 인간이 느끼는 외로움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사회적 외로움’이다. 공동체 안에서 소속감, 연대감, 친밀감을 주는 친구나 지인이 존재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감정이다. 두 번째는 ‘정서적 외로움’이다. 의지할 수 있는 가까운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느낄 때 나타나는 감정이다. 전우원씨는 이런 두 가지 외로움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고 본다. 전씨는 엄청난 양심에 괴로움을 받고 살아왔을 것이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투정을 부렸다가 ‘어퍼컷’을 맞기도 하고 가기 싫은 가족을 여행에도 “저와 형을 강제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는 차에 태웠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외로움과 고독의 구분에서 ‘내가 나와 교제하는 실존적 상태’를 고독이라고 한다면, 외로움은 고독과 마찬가지로 홀로 ‘인간 집단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나 자신으로부터도 버림받는 상태라고 했다.
그래서 외로움이란 달리 표현하면 나 혼자이며 동료가 없는 상태이다. 그래서 외로움과 고독은 세상에 지니는 감옥 같은 삶을 지니고 있다고 보면 된다. 우리가 잠을 자면서 하루 동안의 일들을 뇌가 정리하듯이, 너무나 분명한 많은 관계에서 걸어온 관계들이 나에게 새겨 놓은 흔적들을 뒤돌아본다. 폴 틸리히는 “아픔은 외로움을 만들어 내고 고독은 나를 이해하는 동시에 외로운 누군가를 이해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고독은 내 속의 아픈 양심의 소리를 듣는 일일 수도 있다. 인간 세상에 용서하는 마음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그렇게 아름답고 귀한 용서하는 마음은 누구와도 격이 없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고 존경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세계적인 재벌인 미국의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는 자기보다 훨씬 탁월한 인재들을 수없이 많이 두었던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어떻게 뛰어난 인물들을 옆에 둘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카네기는 그 비결 중에 하나로 '용서의 마음'이다.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입고 갈등을 겪고 산다면 살맛이 나지 않는다. 인간관계가 왜곡되고 미움과 분쟁으로 어려움을 느끼면 스스로 큰 아픔을 겪게 된다.
요즘 세상은 모든 분야에 갈등이 너무 심하다. 잘 살고 출세하기 위한 서로 간에 반목과 알력이 도를 넘어 정글 사회로 변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성과 양심이 없는 반목의 사회로 만약 용서가 없이 반목과 질시가 계속된다면 공멸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이런 현상을 해결하는 방법은 서로 용서하는 이성과 양심 소리를 듣는 마음이다. 서로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하는 혀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