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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의 오클로스 사람들 태안장로교회 원로목사 사회복지사 글:-남제현목사 태안신문사 칼럼니스트
예수님 시대 갈릴리의 오클로스 사람들은 정치적으로는 차별당하고 소외를 당하는 사람들이며 경제적으로는 부조리한 사회 구조의 악순환 속에서 착취를 당하며 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교적 폐쇄적인 율법 체제 속에 갇혀 죄인으로 취급당하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란 서글픈 삶에 공통점은 물질적 가난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가난'이라는 것은 정치적 과정과 사회와 경제적 종교적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결과물 중의 하나였다. 표면적으로는 빵을 갈구하는 듯 보였지만 내면적으로는 자유를 갈구하고 있었고, 그 자유는 신앙에서 인간다움의 삶이었다.
오클로스를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가난은 자유에 대한 가난이며, 신앙과 인간다움에 대한 가난이다. 그러므로 갈릴리의 오클로스는 단순히 부조리한 정치와 경제와 종교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21세기 한국의 갈릴리의 오클로스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과거 2,000년 전의 갈릴리의 큰 차이가 있으면서 갈릴리에 형성된 정치와 사회, 경제와 종교적 현상들이 우리 국민에서 유사하게 일어나고 있다. 투키디데스는 “전쟁의 진정한 원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는 것이다.
덴마크 키르케고르의 철학자는 윤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아브라함의 행위를 심미적·윤리적·종교적, 최종적으로 기독교적 실존에 여러모로 바라보면서 오로지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행위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두려움과 떨림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다. 윤리적으로 아브라함은 살인미수자, 그것도 살인 중에 가장 잔인한 살인으로 규정되어 있는 비속 살인미수자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범죄자가 기독교에서는 신앙의 영웅으로 찬양되고 있는가?
키르케고르에 는 아브라함은 윤리적 의무를 무한히 체념하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관계 안에서 들어가 보았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제약하는 윤리적 의무와 그 윤리적 의무를 지지하는 보편적 세계를 넘어서서 하나님 앞에 홀로 선 것이다. 이러한 영웅적 비약은 너무나 높은 경지여서 두려움으로 전율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경우 발목을 잡아당기는 달콤한 유혹뿐이다. 이 달콤한 유혹을 상상할 수도 없는 단호한 결단으로 뿌리쳤기 때문에 세계의 밖으로 나가버린 외톨이가 될 수 있었다.
갈릴리의 오클로스에 갈릴리 오클로스의 이야기가 먼 과거에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것이며, 그들의 삶의 현장이 바로 현대인의 치열한 삶의 현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현대인은 과거 느꼈던 만큼의 삶의 절박함은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형태의 절박함을 알고 미래의 삶을 향해 돌진해 가고 있을 뿐이다. 그들도 먹고사는 문제 보다 더욱더 크게 부각 되었을 것이다. 질환으로서의 두려움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일상에서 우리는 이념의 가치를 안고 살아간다. 그래서 두려움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지 않아도 정서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될 때 지키려는 욕구, 인정받고 싶은 욕구, 지배하고 싶은 욕구가 일어나는 것도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 나는 길이다. 왕십리 민초들의 삶터 전이었다. 서울 왕십리 일대는 밭작물을 재배하던 농경지였다. 그런데 서울의 변두리 지역을 거쳐 간 인물들이 이렇게나 많을 줄은. 놀랍다. 그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이렇게도 풍성하게 담아냈다는 것이. 서울 사소문 가운데 동남쪽 광희문을 나서면 ‘왕십리’라고 일컬어지는 지역이 펼쳐진다.
조선 시대 한양 도성의 중심인 종로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 왕십리 한다. 이들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이들은 주로 밭작물을 재배하던 농경지 아니면 공동묘지가 있던 왕십리라는 특성과 맞물려 있다. 서울 부근에 광희문 밖처럼 쾌감을 주지 못하는 데는 없을 것이다. 먼지에 파리며 냄새며 묵은 무덤들에서 드러나는 해골 조각이며 쓰러져 가는 오 막 집 따위가 하나도 새롭고 깨끗한 맛은 없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옛 왕십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모습이다.
“빈곤에 대한 멸시와 조롱은 만연”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 들어가면 급지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 말은 사는 곳에 따라 계급이 결정돼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실 주거 형태에 따라 계급을 나누는 세태는 꽤 오래됐다. 전·월세, 빌라, LH 아파트 등을 비하하는 말이 초등학교에서조차 한때 유행하기도 했다. '공격 사회'에 "빈곤에 대한 멸시는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있다"라고 진단한다. 우리 사회에서 빈곤한 사람은 사회에 존재할 가치가 없고 나아가 위협이 되는 존재라는 시각이 있다.
빈곤한 사람에겐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 '폭력적인 사람' '잠재적 범죄자' 등의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그렇게 함으로써 빈곤한 사람을 멸시하고 기피할 정당한 근거를 만든다. 빈곤한 사람들을 공격하는 이들은 빈곤을 '사회악'으로 취급하고, 그 사회악을 저지른 책임이 전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에게 있다고 주장한다.그러나 청년·노인 가릴 것 없이 빈곤할수록 열심히 일한다고 있다. 아르바이트하고, 폐지를 주워도 자산 부족이나 전문적 기술 부족에서 오는 격차를 극복하기가 어렵다.
우리 사회에서 빈곤한 사람은 사회에 존재할 가치가 없고 나아가 위협이 되는 존재라는 시각이 있다. 빈곤한 사람에겐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 '폭력적인 사람' '잠재적 범죄자' 등의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그렇게 빈곤한 사람을 멸시하고 기피할 정당한 근거를 만든다. 빈곤한 사람들을 공격하는 이들은 빈곤을 '사회악'으로 취급하고, 그 사회악을 저지른 책임이 전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에게 있다고 볼수없다. |
